매운 음식을 먹고 낮잠을 잔 탓인지 속이 굉장히 쓰린 느낌을 받으며 잠에서 일어났습니다. 달콤한 걸 먹어봐도 이미 뜨거워진 속은 재울 수가 없나 봐요. 저는 이렇듯 종종 기분이 들썩이거나, 심장이 조여지는 느낌을 받을 때는 매운 음식을 주문합니다. 다친 원인을 들키지 않으려 미리 위해를 가하는 것처럼요. 매운 음식을 양껏 먹고는 죽은 듯이 잠을 잤어요. 잠시나마 주어진 현실로부터 도망을 치고 오면 그나마 머리가 말끔해져요. 지금처럼요. 연약한 자해 후, 한껏 맑아진 정신과 약간은 쓰린 속으로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글로 만나는 건 오랜만입니다. 제피.
서간문을 제안했을 때 역시 제피라면 쉽게 수락하리라는 것을 저는 알고 있었어요. 이 번거로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은 당신뿐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지요. 우리가 함께 아는 사람 중 글을 쓰거나 읽는 행위를 사랑하는 것을 넘어, 의존하는 사람은 제피와 나 단 둘뿐이니까요. 사실 조금 과할 정도지요. 어쩌면 제피가 말한 대로 자신을 잘 숨기는 모습이 닮은 우리가, 유일하게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이라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럼에도 편지는 자못 애정을 요하는 글이니, 저는 보다 건강한 방법으로 우리의 글을 마음껏 쓸수 있다는 명분에, 사실 아주 기뻤습니다. 차마 내뱉지 못한, 어떤 경계에서 떠도는 마음들을 나누는 시간이 그려집니다. 활자 위에 마음을 쏟아 버리고 남은 우리의 마음은 조금 가벼워질 거라는 확신이 듭니다.
서른을 물어봤군요. 사실, 오늘의 날짜도 제대로 알아채지 못할 만큼 수에 둔감한 편이라 서른이 다가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어요. 의식하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맞겠네요. 프리랜서로 살아가며 근래는 휴대폰 알림마저 꺼놓다 보니 수보다는 계절을, 시간보다는 온도를 더 민감하게 느끼고 있어요. 서른도 대충 ‘가까운 미래’ 정도로 퉁치며 생각하고 있네요. 덕분에 당신의 섬세한 시각으로 서른을 떠올려봅니다. 여전히 별생각은 없지만요. 이렇게 반대이기에, 나는 우리의 관계가 재미있어요. 대체로 모든 부분이 다르지만 어떤 부분이 첨예하게 비슷하기에 이렇게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올해는 한 번 계획을 세우려고요. 마치, 제피의 냉장고 문 앞에 붙어있던, 반쯤은 이루어진 ‘2021 올해의 계획서’처럼요.
가장 큰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나에게 더 집중하는 삶이에요. 아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요즘은 일이 없으면 아예 밖에 나가지 않아, 바깥 공기는 창문을 통해서만 들이키는 날이 더 많아요. 주로 누워있거나 애인을 위한 요리를 하거나 추리 소설을 읽어요. 특히, 일본 소설들을 많이 읽는데 어딘가 요상하게 변태 같은 모습을 띠고 있는 화자들에게서 저를 봅니다.
제피도 알다시피, 저는 평소 요망한 구석이 있잖아요. 반면, 당신은 차분하고 조용하죠. 사실 보이는 모습들은 우리의 아주 작은 구석이지만 아마 주변의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시간이 가면서 저는 쓸모없는 만남을 줄이고, 더 이상 애써 분위기를 띄울 필요도, 빈 오디오를 메꿀 궁리도 하지 않게 되었어요. 서른이라는 숫자를 맞이하면서, 보다 본질에 가까운 나로 살아가지 않을까 싶어요. 늘 많은 사람 속에 둘러싸여 있던 나는, 한 번도 제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될 거라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러나 사실은 맞지 않는 옷을 아주 오랫동안 입어, 몸이 옷에 맞추어진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소한 시작을 바탕으로 제 계획을 먼저 제피에게 공유해 볼게요. 30대 초반에 이루고 싶은 것들입니다. 아직 2022년 1월 1일까지는 며칠의 시간이 남았으니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겠습니다.
- 운전면허 취득 : 20대의 반을 함께했던 게임을 접게 되며 컴퓨터를 100만 원에 팔게 되었어요. 그 돈으로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딱 그 정도의 비용이 드는 면허를 따면 어떨까 싶었어요. 나름대로 의미 있는 곳에 쓰고 싶었거든요.
- 국비 지원교육 활용 : 나의 엄마가 이것을 통해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는 것을 보았어요. 배우고 싶은 것을 나라에서 도와준다는데 저도 냉큼 배워야지요. 동화 작가 관련 수업이나 1인 출판에 관련된 수업을 듣고 싶어요. 전공을 살려 목공 수업을 듣는 일도 고려하고 있습니다.
- 요가 : 할 거라고 수없이 말했지만, 올해 지켜지지 못한 계획이에요. 30대에는 꼭 제게 알맞은 운동을 찾아내고 싶네요. 우선, 요가부터 시작해 볼게요.
- 애인과의 미래 준비 : 아이를 너무 가지고 싶지만, 평생 누군가를 사랑할 자신이 없어 미혼모가 될 거라던 철 없던 제가 생각나나요? 근래 사랑을 하는 법을 배우면서 저도 결혼이란 것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먼 미래지만, 애인과 결혼 자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까지 즐거운 요즘이네요. 미래를 계획하는 것은 막연하지 않은 기대를 줍니다.
(*구독자 분들에게만 알려드리는 건데요. 1년이 흐른 지금. 저는 단 하나도 이루지 못했답니다! 역시 안시내답다! )
아주 가끔 있는, 수선스러운 모습을 벗어 둔 채 나누는 제피와의 새벽 대화처럼 지금 이 시각 잠들어 있을 당신을 향한 편지를 쓰는 것도 상당히 즐거운 일이네요. 첫 발걸음이 상당히 경쾌했어요. 부담 가지지 않고, 아직 마음속에 머무는 당신을 향한 말들을 다 써가겠습니다. 연서는 아니니 걱정하지 말고요. 마지막으로, 오늘 책을 읽다가 꼭 들려주고 싶은 문장으로 마무리 짓겠습니다. 랠프 월도 에머슨의 ‘우정’이라는 산문집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진정한 친구란 호락호락하지 않은, 마음으로부터 존경할 수 있는 아름다운 적이다.”
P.S 최근 내린 앞머리, 제피가 한 머리 중 가장 마음에 들어요. 칭찬을 매번 밀어내는 제피 덕에 당신을 향한 칭찬을 자꾸만 삼키게 되네요. 저는 압구정에서 그 모습을 한 제피를 처음 만난 날 뒤돌아서 소피 마르소 같다고 외쳤답니다. 당신이 들었을까 조마조마하면서요. 자세히 뜯어보면 딱히 닮은 구석은 없는데, 보자마자 그렇게 느껴졌어요.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에요. 알다시피 저는 항상 진심이 담긴 칭찬과 진심이 담긴 갈굼만 행합니다.
사랑을 담아,
샤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