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유유연제 같은 샤인에게
계획대로라면 샤인이 추천해 준 횟집에서 싱싱한 회를 한 점 집어삼키며 부모님과 함께 저녁 식사를 즐기고 있어야 할 겁니다. 계획표 있는 여행의 시작은 종범이와 사소한 댓글을 주고받으면서 시작됐어요. 대한민국 사람에게 이제 관상이라고 불리는 ‘MBTI’따위로 논쟁하다가 나답지 않은 결심을 했습니다.
계획을 했어요. 내가요. 2주라는 시간을 할애하여 인생 처음으로 엑셀로 여행 계획을 꼼꼼하게 세웠습니다. 숙소도 미리 잡고, 소요 시간과 비용까지 기록해가면서 말이죠. 이번 여행은 극단적인 ‘P’ 이수현이 아닌 계획적인 ‘J’로 살아보기로 한 겁니다. 작년 한 해 동안 피티샵 선생님과 생활 습관들을 많이 개선했습니다. 계획적으로 삶을 굴렸습니다. 물론, 예외도 있었죠. 여행에서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습니다. 여전히 나만의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에 한 번도 그 부분을 새롭게 시도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시도라는 말이 웃기지만 말이에요.
결말이 참 평범하지 않네요. 시작하지도 못했는데 끝나버렸어요.
그니까 요즘 흔하게 쓰는 유행어처럼 ‘있었는데요. 없어요.’였던 거죠.
그동안 계획했던 나의 시간과 고민이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아 화가 났어요. 그러나 누굴 탓하겠어요? 그건 아버지의 잘못도 아니고, 어머니의 실수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운이 없어서, 그런 상황을 만나버린 거죠.
여행을 포기하고 어플로 찾아낸 어느 싼 호텔에 갔습니다. 엄마는 코까지 골며 잠을 잤는데 아빠는 새벽 4시까지 눈을 뜨고 잠을 자지 못하더라고요. 새벽 3시쯤 아빠에게 왜 자지 않냐고 물었더니 죄책감에 잠을 이루지 못 하겠대요. 저는 답했어요. ‘아빠 잘못 아니야. 괜찮아.’라고 말이에요. 생각해 보니 아빠에게 괜찮다며 다독이던 게 처음이더라고요. 늘 내가 울고 힘겨워하면 초인의 힘을 가진 아빠는 등을 두드려주며 괜찮다고 했어요. 이제 나도 자라나서, 점점 더 연약해지는 그들을 위로하고 있더라고요. 문득 B가했던 말이 떠올랐어요. 나이가 점점 들수록 어른들은 시간을 반대로 걷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연약해진다고요.
이야기가 길었어요.
늘 편지의 루틴을 보면 주에 있었던 일을 샤인에게 한바탕 떠들고 난 후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요. 샤인이 썼던 편지 중에 박혀있던 ‘일기’라는 단어처럼요. 나는 샤인의 메일이 오고 사실 오늘까지 읽지 않았어요. 편지가 읽기 싫어서는 아닙니다. 나는 샤인의 서간문을 늘 경건하게 읽어요. 핸드폰을 내려놓고 가장 좋아하는 에릭 사티의 음악을 틀어 놓고 한 글자씩 꿰뚫어 봅니다. 당신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그저 당신의 향을 맡아보려고요.
샤인이 그랬죠. 저의 글에는 ‘이렇게도 살았다.’라는 울림이 있다고. 사실 글을 쓸 때 나도 샤인과 같은 고민을 합니다. 어렸을 때는 그저 쓰는 게 좋았다면 지금은 그간 풀지 못했던 고약한 마음을 풀어내요. 쓰고 나면 마음이 공허하면서 시원해요. 그래서 나의 글에 코를 박으면 어떠한 냄새도 나지 않아요. 휘발된 마음만이 남아 있으니까요. 반대로 샤인의 글을 보고 있으면 풍만한 향이 나요.
기억을 냄새로 떠올리거든요. 예를 들면 태국의 밤 주민들이 사는 골목에서 나는 라임 향 모기퇴치제 냄새라던가, 일본에 가면 느껴지는 반듯한 섬유 유연제 냄새처럼 말이에요. 사람도 그래요. 샤인의 글을 기억할 때면 늘 곰돌이가 한껏 그려진 섬유 유연제 냄새가 나요. 값비싼 향수는 아니지만, 마음이 편해지고, 향수와 다르게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계속해서 그대로 냄새만 맡을 수 있는 향 같습니다. 두고, 두고 평생을 봐도 편안해요. 모든 단어에 ‘ㅍ’이 들어가는 걸 좋아하는데 샤인의 글은 곰돌이 그림이 그려진 섬유유연제처럼, 이 세상의 모든 ‘ㅍ’ 들어간 낱말같아요.
가끔 지친다면 힘을 빼도 괜찮아요. 힘을 뺀 당신의 글 또한 명확한 향이 있을 테니까요.
인생은 늘 엉성하기에 풍요롭거든요. 계획했던 일이 생각처럼 되지 않아 벌어진 사건에서 마주한, 우연으로 만난 연인처럼. 가끔 힘을 빼고 글을 써보는 연습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더욱이 당신은 ‘ㅍ’같은 사람이니까요.
고뇌라는 단어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이건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고요. 그러나 쓰는 일은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완벽하지 못해요. 당연하기 때문에 우리는 좌절보다 이겨낼 나만의 방식을 탐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쓰고, 고치며, 훗날 미래에 이불을 한 줌 걷어차도 또 그때가 아니면 못 썼던 글이라며 나를 다독여주면서요. 그게 글쓰기의 첫걸음 아닐까요.
이번 샤인의 편지에는 전적으로 공감할 글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낙담을 늘어놓은 저번 편지에 순간 쑥스러웠어요. 이럴 줄 알았기에 저번 편지에 괜스레 핑계를 여러 군데 심어뒀어요.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재력가는 아니지만요. 우리는 낱말 하나로 누군가의 세상을 함께 걸어 줄 수 있는 글을 써요. 같이 비도 보고, 눈도 보고, 넘어지고 일어서면서 누군가의 세계관을 만드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옆에서 걸어 줄 수 있는 글이 되길 기원하며 이렇게 쓰는 일을 계속해요. 그리고 글을 쓰며 괴로운 우리 자신을 보며 대견해하고 다독여줘요. 괜찮다. 다 괜찮다 하면서. 그렇게 쓰며 살아가요. 우리.
사랑을 담아,
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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