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를 타는 제피에게
바쁜 한 주가 지났겠네요. 제피가 보여주던 잔잔하던 삶에서, 지난 한 주는 꽤 많은 일을 겪은 특별한 휴가였습니다. 제주와 순창에서의 여행. 그리고 당신의 삶의 방식을 완전한 타인들에게 알려주는 제피. 들뜸과 혼란이 함께하던 그러나 여전히 잔잔한 표정을 유지하던 말간(살짝 부어서 유난히 귀여웠던) 얼굴이 잊히지 않아요. 순창을 함께했던 건 정말 옳은 선택이라고 느꼈습니다.
내가 제피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느낀, 가장 뜨거운 이야기는 당신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지난 편지에 적힌 이야기를 더 생생하게 들었지요. 제피의 집에서 마주한 아버지의 얼굴이 모락모락 떠올랐어요. 나는 이야기를 듣는 한편에 나와 당신이 모르는 제피 아버지의 삶을 계속해서 떠올렸어요. 엠비티아이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나는 우리의 가장 적합한 공통점인 ‘P’말고도 ‘N’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봐요. 유난히 쓸데없는 생각과 결실 없는 상상을 많이 하죠. 당신이 조금 더 심한 것 같아요. 물론, 그것은 우리의 삶과 대화를 훨씬 풍요롭게 만들지만요. 그래서 당신과 둘이 대화를 하게 되면 이상을 끝도 없이 늘어놓아도 아무도 막는 사람이 없어요.
당신의 예비 신랑은 쌀국수를 잘 만드는 베트남 사람이었다가 담백한 얼굴을 가진 일본 남자였다가 미국의 어느 교회에서 만난 부자이기도 했어요. 우리는 유럽에서 호떡집을 차려서 백억 부자가 될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히말라야 한복판에서 하기도 했지요. 그나마 현실성이 있었던 이야기는 제피가 맥주를 따르는 섹시한 할머니가 된다는 정도였죠. 이런 성향 탓일까 가끔 길을 걷다가 한 사람과 눈이 마주칠 때면 나는 그 사람이 여태까지 살아온 삶을 생각하다가, 나이 먹은 행인이 나중에 낳게 될 자녀를 생각하다가, 어떤 모진 말을 듣고 늙은 행인의 얼굴에 주름이 새겨질까 걱정을 하다 길을 잃어요.
그래서 얘기를 듣는 내내 당신 아버지의 마음이 영화처럼 머릿속으로 재생되었습니다. 제피의 아버지는 새벽 네 시까지 편히 눕지 못하고 자기의 실수를, 실수 덕에 구겨진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을 떠올렸을 거예요. 다른 사람이라면 커다랗게 느끼지 않을 일을 유난히 선하고 수그러든 눈망울을 가진 당신의 아버지라면, 당연히 그러리라고 생각했어요. 아마 아버지의 삶에서는 할 말을 끝내 다 하고 마는 아내, 주관이 뚜렷한 딸과 평생을 마주하면서 떠오르는 말들을 계속해서 삼키는 나날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정하고 연약한 마음이 나의 마음을 계속해서 울렸습니다. 나는 연민도 존경도 아닌 아버지의 사랑에 계속해서 감탄하면서 이야기를 들었어요. 잠든 가족의 모습을 보며, 가족의 마음을 떠올리며, 자책하고 또 자책하는 모습은 가장 커다란 사랑이 아니면 무엇일까요. 빠릿하게 몸을 움직여 예정대로 행동했으면 보았을 뻔한 아내와 딸의 웃는 모습을 몇 번이고 생각했을까요. 아빠를 안아주는 딸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마운 결말에 숨을 돌렸지요.
아마 마흔 살이 된 제가 제피에게 종종 이 이야기를 할지도 몰라요. 최근 들은 이야기 중 가장 고약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이니까요.
사고는 점점 나아가, 순창의 어느 언덕이 없는 산을 걸으면서도, 그 아름다운 남자의 딸인 제피에 대해서 떠올렸어요. 요즘의 당신에게서 보이는 모습은 지난 7년간 알아 온 모습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파도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그간 봐온 제피는 사랑이란 단어에 가장 겁을 먹는 존재였습니다. 사랑으로부터 도망치고 물러서는 모습을 수없이 봐왔어요. 내가 아는 또래의 모든 사람 중 가장 어른스럽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당신이, 사랑에 관해서는 커다란 강아지를 보면 몸을 숨기는 유치원생 같다고 느꼈거든요. 반면, 세상의 모든 사랑을 계속해서 의심하는 모습은 수십 번이나 사랑을 겪고 실패한 팔십 노인 같기도 했고요.
그런 당신이 슬그머니 사랑의 보자기를 풀어가는 모습이 신기합니다. 자신을 향한 마음들을 이해하고 마는 제피의 모습이 고맙기까지 했어요. 사랑은 죄악이다. 나는 친구가 없다. 당신이 자주 내뱉던 가냘픈 문장들이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것이 정말 기쁩니다. 언젠가는 당신에게 달려가 팔짱을 끼고 작은 손을 잡고 걷는 날이 오지 않겠느냐는 작은 기대도 품게 되었어요. 나약한 품을 보여주며 체온으로 서로를 끌어안는 그런 날이요.
그래서 궁금했습니다. 무엇이 당신을 사랑으로 이끌었을까. 마음속에 아주 작게 존재하던, 사랑이 담겨있을 공간을 누가 키웠을까.
최근의 내가 애인을 관찰하는 것에 너무 집중해버리느라 당신에게서 놓친 부분이 있을까요. 제피의 일기장이 있다면 딱 지난 6개월 분량만 훔쳐 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잘못 본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랑이라는 감정이 주는 고유한 향기를 맡아 버렸거든요. 이유를 알려주지 않아도 괜찮지만 계속해서 이 파도를 지탱해주세요. 저는 당신의 시야 안에서, 계속해서 마주 보며, 느린 걸음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샤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