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를 타는 제피에게
안녕, 제피. 제가 편지를 읽는 이곳은 합정에 있는 공장을 개조한 카페입니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빛이 잘 들지 않는 공간이에요. 이 공간의 색채와 어울리는 듯한 편지의 서문을 읽다가, 한 문장에 웃음을 짓습니다. 제피에게 직접적인 언어로 친구라 불린 사실이 너무나도 기뻐서요. 모든 편지의 내용을 상쇄할 만큼 그 문장에 기뻐하는 저를 보니 참 이기적인 인간 같기도, 혹은 정말이지 단순한 사람 같기도 합니다. 신기하게도 창밖을 보니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했어요. 셔츠에 니트를 입고 나왔을 만큼 날씨가 많이 풀렸는데, 신기하네요.
오늘은 아침에 눈도 번쩍 떠졌고, 프라이팬을 태우지 않고 오리고기를 구웠어요. 코팅이 죄다 벗겨진 프라이팬이라 반의 확률로 눌어붙어 타버리고 말거든요. 합정까지 오는 길에 만난 두 번의 지하철은, 제가 승강장에 도착하자마자 함께 왔어요. 그래서 예정보다 빨리 제피의 편지를 읽을 수 있었죠. 사실 이런 작은 기쁨들은 어제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자못 다정한 당신이 아직은 어색하게 느껴지는 상태로, 우리는 인사동에서 만나 한정식을 먹었고 우리의 서간문에 관한 이야기를 엇나감 없이 가꾸었어요. 보통 이야기가 새고 마는 우리잖아요(자꾸 우리라는 단어를 쓰는 것부터가 당신의 한 문장에 잔뜩 들떠버린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멈출 수가 없네요). 일을 마치고 맛본 북촌에 있는 친구네 삼촌 가게에서 만드는 호떡은, 못난 모양이지만 참 기분 좋은 맛이었고요. 삶이 어여쁘게 스며든 삼촌의 주름과 맞은 편 피자집의 잘생긴 쉐프까지. 무해하고 유익한, 가히 완벽한 하루였지요. 좋게 풀리는 것의 궤도에 올라서면 저는 며칠 정도는 행운이 따르곤 해요. 반대로 작은 불행들이 시작되면 그것 역시 며칠간 저를 따라오고요. 오래간만에 찾아온 긍정적인 삶의 궤도에 감사하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지금 제가 글을 쓰는 자리에서 고개를 들면 나쓰메 소세키의 초상이 보입니다. 이런 얼굴을 가진 작가인지 처음 알았습니다. 꽤 권위적인 표정을 짓고 있네요. 나쓰메 소세키에 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작품이 강렬히 생각납니다. ‘도련님’이라는 작품입니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던 저는 교내에서 열린 독후감 대회에 해당 작품에 관한 독후감을 제출했습니다. 명확한 주제 의식을 가지고 쓴 글이었어요. 굉장히 공들인 작업이었기에 내용이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이 납니다. 해당 독후감에서 저는 등장인물을 선과 악으로 나누어 권선징악으로 귀결되는 글을 썼습니다. 잘 쓴 글이었지요.
안타깝게도 상을 타지 못했지만, 독후감에서 발견한 어린 시절의 저는 아주 쉽게 인물을 선과 악으로 나눌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엄마의 친구들만 봐도 쉽게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할 수 있었어요. 매일 과자를 사 오시던 흰 머리의 도서관 관장님은 착한 사람, 술만 마시면 넥타이를 머리에 두르고 천박한 언어를 구사하던 어느 시인 아저씨는 나쁜 사람, 아빠처럼 굴며 천 원씩 쥐여주던 초등학교 2학년의 담임 선생님은 착한 사람, 나를 일으켜 세워 아빠 없는 아이라고 공표한 5학년 담임 선생님은 나쁜 사람.
내게 잘해주는 사람을 착한 사람, 내게 상처를 주는 사람은 나쁜 사람으로 치부해버리고 말았어요. 그 사람의 의도와는 상관없이요. 어제는 착한 사람이었던 사람이 오늘은 나쁜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제가 도련님에 대한 독후감을 제출했던 담임 선생님도 그날 제게 나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방과 후까지 남아 다른 아이의 독후감 쓰기를 돕게 했고, 결국 그 친구가 대상을 탔거든요. 저는 상을 많이 탔으니, 양보하자고 말하면서요. 큰 상처였습니다. 비겁한 어른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내 교만함도 온화한 미소로 받아들이고 안아주는 선생님이었는데 말이에요. 그 선생님을 미워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날 선생님이 다른 변명으로 나를 구슬렸기를, 어른이 되어서도 종종 생각했습니다. 당시의 저는 화자의 의도를 정확히 알아채기는 어려운 나이였으니까요.
아마 아시겠지만 어른이 된 저는 미워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선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의 악한 부분도, 악인이라고 생각한 사람에게서 의외의 면모를 보며 사람을 더는 선과 악으로 나누지 않게 되었어요. 내가 내리는 선과 악의 기준의 타당성에 대해서 의심했어요. 결정적으로, 순백의 인간은 없다는 사실도 함께 깨닫고 유치한 흑백 논리를 그만두었습니다. 선과 악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에 존재하던 나의 잣대가 사실 소용이 없다는 사실도 알아챘습니다. 인간은 너무나도 다면적인 존재니까요.
제피의 글을 다시 읽으며 저는 다시금 사랑에 대해 고찰했습니다. 제게 사랑은 ‘이해’입니다. 인정해버린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모든 부분을 이해해버리고 말아요. 사람의 한 부분에 매료되어 버리면 그 사람의 전체를 안아버리고 싶어요. 그 사람의 모든 선과 악을요. 왜, 종종 주변 사람들이 저에게 멀리하라 말하는 사람들, 저는 그런 사람들의 손을 마지막까지 놓을 수가 없어요. 이미 그 사람의 어느 부분에 반해버려서요. 다행스럽게도 그 정도의 애정을 가진 사람은 열 손가락 안에 담길 정도로 적지만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어쩌면 제피를 향한 사랑도 비슷한 이치가 아닐까요. 당신이라는 존재가 어디로 튈지는 몰라도 그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배짱이 있어요.
초라한 모습에서도 사실은 가장 찬란한 사람. 날카로운 날을 세워도 사실은 말랑한 사람. 아마, 그 모습 덕에 당신은 참 많이도 사람들을 밀어냈지만, 그럼에도 여태껏 모두 꼿꼿하게 당신의 옆에 서 있겠지요. 아마, 당신의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토해내며 슬퍼하지는 못하겠지만 나는 아주 오래도록 당신을 생각할 것 같아요. 당신의 문장과 가끔 짓는 호탕한 웃음을 생각하면서요.
나아가 지난 편지에 대한 답을 하자면, 저는 선택적 죽음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입니다. 다른 죽음을 주의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소설을 읽을 때마다, 주변을 볼 때마다 불행 속을 거니는 주인공과 친구들이 기필코 죽지 않고 버티기만을 간절히 바라거든요. 작은 행운들이 뭉쳐 언젠가 행복의 궤도에 오르길 바라면서요.
샤인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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