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취향을 건네준 제피에게
‘백년가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나요?
오래된 음식점의 출입문에 종종 붙어있는 백년가게 마크를 당신도 보았으리라 짐작됩니다. 제가 백년가게에 대해 인식하게 된 건 최근입니다. 저렴하고 맛있는 식당을 찾아 다니는 것이 요즘의 취미인데, 마음에 드는 가게를 샅샅이 살펴보면 꼭 이 마크가 붙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종로의 이문 설렁탕, 청주의 남들 갈비였어요. 두 가게 다 골목 어귀에 숨어 있으며, 간판은 새것이지만 내부의 자재들이 묘하게 낡아 있어요. 벽에 붙은 메뉴판은 수정한 지 오래되어 보였고 그 옆을 자세히 살펴보면 누렇게 바랜 신문에 멋쩍은 표정의 사장님이 걸린 인터뷰가 액자에 걸려 있습니다.
궁금증에 찾아보니 음식점뿐만 아니라 ‘30년 이상 명맥을 유지하면서도 오래도록 고객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점포 가운데, 중소벤처기업부에서 그 우수성과 성장 가능성을 높게 평가받아 공식 인증 받은 점포’라고 합니다. 보통 50년은 훌쩍 넘은 작은 가게들이 백년가게로 불리고 있어요.
오래된 가게를 유난히 좋아하게 된 건 인도 여행 이후입니다. 수많은 사기꾼과 보편적이지 않은 문화도 충격적이었지만 그곳에서 가장 놀랐던 사실은 아주 많은 가게와 집, 길마저도 세월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오래되었다는 것이에요. 화덕에서 음식을 하는 것을 실제로 본 것도 인도가 처음이었어요. 포장된 도로가 이렇게 드문 것인지도 처음 알았고요. 오래된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로 나와 같은 평행선,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인도는 큰 충격과 기쁨을 주었습니다. 소탈한 가게에 쪼그려 앉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조리 도구로 요리하는 노인을 보노라면, 그 순간만큼은 책도 영화도 필요 없었어요. 물론, 큰 도시에서 가끔 나를 반겨주던 스타벅스와 버거킹의 세련된 간판에 설레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요.
얼마 전, ‘나는 솔로’라는 프로그램을 보았어요. 진부할 거라 생각했던 예상은 빗나갔고, 친한 이들이 호들갑을 떨며 추천했을 만큼, 다음 화를 기다리게 하는 매력이 있었어요. 제가 가장 기다렸던 건, 자기소개 시간이었습니다. 서로에 대한 아무 배경지식 없이 서로를 마주한 출연자들이 비로소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오고 무엇을 이루어 냈는지, 어떤 부분이 매력적인 사람인지를 스스로의 입을 통해 이야기하게 되어요. 한 여성 출연자의 차례가 왔습니다. 그녀는 그녀가 나온 학교와 직장을 말하고 덧붙여 이목을 끌 말을 했어요.
전 가장 새롭고 트렌디한 장소들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요. 오픈 전에 다 미리 방문해보죠.
사람들은 그녀의 말에 감탄했습니다. 정말이지 누구보다 빨리 트렌디한 곳을 알아챌 만큼 세련된 옷차림과 태도를 가졌거든요.
그 방송을 보며 얼마 전 당신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우리의 친구 C는 여행지에 가면 항상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 멋진 차림새를 한 사람들을 만나고는 하는데 왜 내가 가는 곳에는 그런 사람들이 없는 것인가, 결국 그런 곳을 애초부터 찾지 않기 때문에 만나지 못했던 게 당연했다는 이야기요.
음식에 맞는 와인을 척척 골라내고 뉘앙스에 걸맞은 멋진 말을 하는 어른들도 좋지만, 저는 누추한 곳에서도 자연스럽고 해사한 웃음을 짓는 순수한 여행자들을 더 사랑합니다. 당신처럼요.
당신은 저물어 가는 것들을 존경합니다. 그리고 나 역시, 저물어 가는 것들 속에서 꿋꿋하게 긴 시간을 버텨낸 것을 존경합니다.
수많은 시간을 당신과 함께하며 어쩌면 인도 여행 후 사라졌을 수도 있는 취향-오래된 것들을 좋아하는-을 건네받았습니다. 인도의 가장 허름한 노점상만이 달래주는 향수병과 강원도 어귀의 간판 없는 수제비 가게의 슴슴한 맛은, 사실 미묘한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당신이 없었다면, 나는 어쩌면 그 마음을 까먹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나는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여전히 많습니다. 여전히 모든 것들이 그 자리에 있어 줬으면 하는 것이, 헛된 욕심이자 작은 소망입니다. 아날로그 세계와 인도가 영원히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처럼요. 그래서 나는 외롭고, 오래되고 척박한 것을 애잔하게 바라보는 동시에 동경합니다. 다시 돌아갈 수 없을 때를 기약하며 자꾸만 돌아보고 싶습니다.
이번 주도, 건강하게 보내세요.
샤인으로부터
추신
조만간 함께 영춘옥에 들러 노인의 냄새와 술 냄새가 뒤덮인 곳에서 가장 구석 자리를 잡아, 국밥 한 그릇 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생일 기념으로, 그전까지 어쩐지 돈이 아까워 먹지 않았던 꼬리찜은 제가 시키도록 할게요. 프렌치 레스토랑 같은 곳에서의 멋진 만찬은 10년 안에는 대접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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