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친구 샤인에게
미리 편지를 남깁니다. 일찍 온 당신의 편지를 생일이 되기 10분 전까지 읽지 않았어요. 당신이 종종 말했듯이 나는 가끔 컨셉에 쉽게 빠지는 사람이기 때문이죠. 생일입니다. 오늘만큼은 들떠있는 나를 이해해주세요.
예전 편지에서 샤인은 말했습니다. 당신의 글은 엄청난 고심 끝에 보내는 글이라고요. 뜬금없지만 나는 당신과 달리 글을 휘날리는 속도가 아주 빠릅니다. 제가 천재적인 재능이 있어서 그렇냐고요? 글쎄요. 그건 아닙니다. 나름 저만의 습관이라는 게 있어요. 한 단어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단어에 첫 문장이 그려지면 그때부터 써 내려갑니다. 때문에 눈치챘을지 모르겠지만 간혹 정리되지 않은 문장의 구조와 뒤죽박죽 글을 써 내려가는 게 또 저의 글이라는 걸요.
생일은 그 해의 나를 대변합니다. 매번 다르게 보냈거든요. 예를 들어 21살 생일 때는 아주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소주와 어묵 국물 그리고 하얀 생일 케이크를 두고 혼자 생일을 보내기도 했어요. 때로는 거대한 파티를 열어 여러 사람과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뭐든 귀찮아서 조용히 혼자 보내려고 했어요. 그때 부모님께 연락이 왔어요. 드디어 양력 생일을 축하해주더라고요(어른들은 왜 음력이 더 편한 걸까요? 나는 음력이 불편한데...).
‘생일 이제? 맛있는 거 먹자’
매년 생일마다 양력 생일을 챙기지 않아서 내가 먼저 나의 생일을 알렸어요. 고등학교 때는 친구들에게 받은 생일 케이크를 들고 야자가 끝난 후 생일이 지나기 10분 전에 집에 들어왔더니 ‘누구 생일이니?’라고 묻더라고요. 저는 그런 부모님이 미웠어요.
샤인에게 말했나요. 주민등록상 생일은 3월 8일이 아닙니다. 그 당시 엄마는 음력으로 주민등록번호를 등록하셨어요. 그래서 어렸을 적 매년 생일마다 나는 집에서 나의 출생 사진과 기록을 찾아보고 안도했죠. 혹시나 내가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는 아닐까 하는 의심과 함께.
샤인은 우리 아빠 이야기를 참 좋아해요. 저도 우리 아빠를 보면 참 웃기고요. 오늘은 글쎄 신사역 1번 출구에서 부모님을 기다리는데 저 멀리서 노란 프리지아 꽃다발을 들고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두 명의 노인을 봤어요. 엄마랑 아빠더군요.
샤인의 생일에 탄생화와 편지를 준 걸 기억하나요? 나에게 꽃은 중요한 의미로 작용해요. 누군가에게는 쓸모없는 꽃은 내게 보기만 해도, 놔두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니까요. 더불어 세상을 살아가며 생일에 걸맞은 식물이 있다는 건 얼마나 근사한 일인 걸까요. 또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흘렀네요.
3월 8일의 탄생화는 밤나무꽃입니다. 신기하게도 꽃말은 진심, 정의, 공평, 포근한 사랑이라고 합니다. 예전에 샤인에게 라일락 비슷한 꽃을 주며 당신의 꽃말을 말씀드렸는데 샤인의 탄생화는 운명적인 만남 그리고 사랑의 싹이지요. 꽃말이 꼭 당신과 닮았어요. 과학적인 근거는 없지만, 꽃말은 그 사람을 참 닮았어요. 예전에 친구 A의 꽃말 또한 A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고요.
사실 내가 가진 탄생화보다 좋아하는 꽃이 있어요. 프리지아라는 꽃입니다. 7살 때인가 유치원 졸업식에 엄마가 들고 왔던 꽃인데 그 냄새를 맡은 날을 잊지 못해요. 정확한 상황이 기억나지 않지만 확실한 건 꽃의 향입니다. 프리지아의 꽃말은 새로운 시작, 천진난만, 자기 사랑, 당신의 앞날이래요. 꽃말도 향을 무척이나 닮았어요. 나의 탄생화는 아니지만 제가 추구하는 단어들과 꼭 맞기도 하고요. 꿰맞추는 것 같지만 저는 우습게도 이걸 운명처럼 여긴답니다.
이번 편지에 취향을 건네준 이야기를 해줬어요. 나는 글을 읽고 100년 식당부터 프렌치 레스토랑까지, 어쩌면 나를 가장 잘 아는 당신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오래된 노포도 사랑하지만 고급스러운 식당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걸 아는 당신이 놀라웠고요. 그리고 취향을 존중해 주고, 모순적인 삶의 태도에도 긍정적인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당신이 있기에 태어나길 잘 했다고 느껴집니다.
편지를 10분 만에 쓰려는 건 어리석네요.
역시나 머리에 엉켜있는 생각들을 꽤 빨리 쓴다고 느꼈지만 그건 오만이었음을.
영춘옥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영춘옥을 먹고 좋은 LP 바에 가서 음악을 듣도록 해요. 아주 낡은 음악들을 들으며 우리라는 세계를 공유해 보고 싶어요.
생일을 축하해 줘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생일을 함께 보내주는 당신이라는 친구가 있어
나는 또 열심히 살아 보려고 합니다.
p.s 3월 8일 생일에 맞춰 친구가 이 노래를 들으면 내 생각이 난다고 해서 보내준 링크인데 샤인도 좋아할 것 같아요. 첨부할게요. 가사가 참 좋습니다.
https://youtu.be/WHhbac6PVqs
익숙함으로부터 멀리 벗어나는 건 쉽지 않겠지만,
인정하자 살아가며 우리가 배운 건
영원한 것은 없다는 거,
아닌가?
<0308-보수동쿨러>
p.s 더불어 당신의 탄생화 일화도 재밌어서 첨부 합니다.(오늘 주전부리가 많네요.)
‘라일락 탄생화의 이야기’
한마을에 절친한 두 친구가 살고 있었는데 두 친구는 서로 가진 꿈이 달랐습니다.
한 친구는 과거의 급제해서 벼슬길에 오르는 것이고 또 한 친구는 신선이 되는 게 꿈이었습니다. 두 친구는 자라서 각자 자기가 원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 한 친구는 서울로, 다른 친구는 산으로 떠났습니다. 서울로 간 친구는 과거 급제를 해서 벼슬에 올랐습니다. 신선이 되기 위해 산으로 떠난 친구가 걱정 되어 산으로 친구를 찾으러 떠났는데, 어떤 지점에 이르니 아름답고도 향긋한 라일락 향기가 풍겨왔습니다. 그때 친구가 나타나서 두 사람은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친구와 작별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어느 노인이 자기네 집으로 와서 손주를 찾는다며, 방방곡곡 찾아다닌다고 했습니다.
몇십 년 전 손주가 신선을 만나러 산으로 갔지만 아직 손주의 생사를 모르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신선이 된 친구와 하룻밤을 이야기 했는데 지상 세계에서는 몇십 년이 훌쩍 지나가 버린 것입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신선이 사는 곳에는 사랑의 추억이 깃들었다고 해서 아름다운 라일락이 많이 피어있다고 합니다.
사랑을 담아,
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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