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림없이 꼭, 제피에게
안녕, 제피. 오늘은 고백할 것이 있어요.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사실 저는 심각한 운명론자입니다. 일상에서 특별한 일이 생길 때마다, 이것은 운명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누군가와의 만남, 이별, 하루의 불행 같은 것까지요. 운명은 제게 종교 같아요. 특히나 힘든 일이 생길 때면, 어쩌면 이것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일이고, 내가 단단히 서기 위한 계단처럼 꼭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운명에 기대어 보기도 해요. 물론, 모든 논리적 인과관계를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했던 행동들이 화살 혹은 기쁨이 되어 돌아오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세상에는 너무나도 운명 같은 일이 많이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어제도 그랬어요. 제피와 영춘옥에서 우리가 벼르고 벼르던 꼬리찜을 먹고 나온 순간(안타깝게도 오만 원에 고작 네 조각이라는 것에 놀라 앞으로 다시 먹을 날은 없을 것 같습니다), 골목 어귀의 할아버지는 샛노란 프리지아를 팔고 있었어요. 한 단에 3,000원. 제피는 망설임 없이 내게 선물했어요. 싱싱한 향이 좁은 골목 안에 가득 차고, 희끔한 수염을 가진 할아버지는 서툰 포장으로 꽃과 함께 미소를 건네었습니다. 이 역시도 어떠한 운명의 힘이 이끌었다고 생각했어요. 바로 직전에 우리는 편지를 통해 영춘옥과 프리지아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에 관해 이야기했고, 나는 종로3가를 그렇게나 자주 누비면서 꽃향기가 가득한 좁은 골목을 발견하지 못했었거든요. 마치 누군가 제피의 생일을 계속해서 축하하려는 것처럼 어떠한 운명의 기운이 골목 어귀까지 당도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사실 저 역시, 가장 좋아하는 꽃을 물으면 늘 노란 프리지아라고 말할 만큼 특별한 애정을 품고 있었어요.
제가 사주와 운명을 믿는 것처럼 제피 역시 꽃말과 별자리에 관해 이야기하곤 합니다. 아마 어떤 현실주의자들은, 이런 것에 관심 가지는 것이 한심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어요. 저도 화창한 아침이면 종종 이런 내가 한심하다고 생각하니까요. 오늘은 세상에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운명과 우연 그리고 필연 대해 떠들어 보고 싶습니다.
운명 :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 인간적인 힘.
우연 :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이 뜻하지 아니하게 일어난 일.
필연 : 틀림없이 꼭.
운명과 필연은 마치 짝꿍 같고, 우연은 운명과 필연을 부정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초인간적인 힘이 우리를 틀림없는 자리로 이끄는 건 맞지만, 어떠한 일을 단순 우연으로 치부하는 건 제 괴상한 사고방식에서는 납득이 가지 않거든요.
최근, 사주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본적인 틀을 알게 되고 나서는 사주를 전보다 신뢰하게 되었어요. 제 사주는 역력하게 제 삶을 담고 있었거든요.
일주와 시주, 모든 시기에 역마살, 지살이 더덕더덕 끼인 모습이, 사주 또한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제 자신 같았습니다. 부모의 자리에는 고란살이 있어요. 사주에서 고란살은 ‘혼자서 외롭게 소리 내어 우는 새처럼 쓸쓸하고 처량한 여자’를 뜻합니다. 나의 엄마는 나를 임신하고부터는 오롯이 혼자서 나를 키웠지요. 매일 밤 울음을 삼키면서요. 내 사주는 나무가 없어서 키가 작다고 합니다. 치아가 고르지 못하다는 것도 담겨 있어요. 불의 기운이 사주에 4개나 있어, 사람들의 사랑을 먹고 자랄 팔자라고 하지요. 참 놀랍죠.
동양 학문인 명리학이 참 재미있는 사실은, 그 어떤 나쁜 살일지라도 사실 좋게 풀 수가 있다는 거예요. 현침살을 예를 들어 볼게요. 날카로운 말을 하는 사람이 주로 가지고 있는 사주입니다. 이 살을 풀기 위해 의술이나 재봉같이 날카로운 것을 다루는 직업을 택하면 더 큰 재능을 가질 수 있어요.
이렇듯, 누군가는 종교를 믿는 것처럼 저는 운명을 믿습니다. 유난히 나쁜 살이 많은데, 제가 가진 모든 나쁜 살들을 풀려면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겸손한 자세로 늘 노력하며 살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더라고요. 자기 검열을 하다 보니 최근 몇 년간 지지부진, 현실에 안주하는 제 태도가 비로소 미워 보이기 시작했고요. 그 모습은 또 좋게 작용해 새로운 일들을 더욱 열정적으로 헤쳐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어요. 남들이 하늘과 신께 기도하는 것처럼 제게 운명론은 ‘믿을 구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금 나의 탄생화를 떠올립니다. 아마 지난 생일, 처음 라일락의 꽃말을 알았지요.
‘사랑의 시작’ 내게는 너무도 잘 어울리는, 평생을 가져가고 싶은 마음이지요.
오늘도 마음속에 떠도는 이상한 이야기를 당신에게 잔뜩 풀어갑니다. 당신과 우주와 운명, 현실을 초월한 무언가에 관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아무것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당신이, 나는 너무도 즐겁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지속적인 만남도 운명의 관성 같은 것이라 믿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우정이지요. 서로에게 필요하며 언젠가는 특히나 꼭 필요할.
세상의 수많은 필연이 모여 우리를 기분 좋은 운명의 굴레로 끌기를 바라며 편지를 마칩니다.
당신의 달 3월에서,
샤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