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제피.
인사가 늦었네요.
인사가 늦은 만큼, 당신이 기뻐할 이야기를 들고 왔어요. 만약 제가 이틀 전, 당신이 볼 수 있도록 제시간에 메일을 보냈더라면 저는 당신과 내가 보았던 날의 눈을 기억하며, 역시 별것 아니었노라고 답했을 거예요. 정말 별것 아니었거든요. 도시에 쌓인 눈들은 빌딩 여기저기로 숨어버려요. 매연이 지나간 자리의 흰 눈은 어느새 닿고 싶지 않을 만큼 지저분한 먹색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저는 유난히 그런 것에 들뜨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어쩌면 아름다운 것들을 외면하려는 저의 습관 같은 걸까요. 아니면 아름다운 것들이 따가운 세상에 닿는 것이 싫은 걸까요. 잘 모르겠어요. 아마, 편지를 써 내리다 보면 알아챌 수도 있을 거예요. 글을 쓰는 일은 제게 마음의 실타래를 푸는 행위니까요.
내가 당신에게 편지를 써야 했던 날보다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 지금, 나는 올해 마지막 눈을, 근 십 년간 본 눈 중 가장 경탄스러운 눈으로 보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누구의 발자국도 남겨지지 않고 광활하게 펼쳐진 눈을 보았어요. 조금 더 나가 보니 손을 호호 불며 눈사람을 만드는 어른의 무리를 보았고요. 눈을 맞으며 뛰어가는 강아지도 보았지요. 그날은 모두가 웃었어요. 모든 근심을 던진 채로, 새하얀 눈처럼 말간 얼굴을 가진 세상 사람들을 보았어요. 버스 기사 아저씨는 나와 나의 무리를 위해 정류장이 아닌 더 안전한 곳에 정차해주었고 내림과 동시에, 세상의 모든 분노는 멸종되고 말았습니다. 그 어떤 눈도 얼룩지지 않은 어느 날에요.
나는 당신이 온몸의 분노를 세상에 소리치던 날을 기억해요. 지금은 그 모든 날을 잊은 것처럼 잔잔한 당신이지만 그 시절의 당신은 툭 하고 건드리면 바로 터져버릴 것 같았어요. 아슬아슬한 당신의 곁에서 나는 당신의 감정이 풍기는 냄새를 간접적으로 맡았어요. 우스꽝스러운 내 행동을 본 당신은 함께 웃거나, 혼자서 삭히다가 눈물로 풀고 말았어요. 사실, 저는 감정의 끝들을 자주 마주하는 당신이 부럽기도 했습니다. 슬픔의 끝, 분노의 끝, 자신의 한계까지 다듬고 갉아내는 모습을 종종 마주쳤지요. 내가 모르는 곳들을 끝까지 걷고 온 당신을 보고 나는 고민했어요. 저 끝까지 다가갈 수 있을까. 가는 것이 맞는 것일까. 풍부한 고통은 우리에게 어떤 사유를 주는 것일까.
오늘은 제피에게 질문하고 싶네요. 당신은 그 감정들의 끝에서 어떤 걸 알았나요?
혹은 그런 감정들에 반하는, 기쁨과 탄생 그리고 사랑의 끝을 당신이 궁금해하진 않을까요?
요즘 저는 잠든 이의 모습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무방비한 얼굴을 보며 쓰다듬기도, 잠든 와중에도 미간을 찌푸리는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기도 하지요. 그러다 문득 당신의 잠든 모습을 떠올립니다. 워낙 잠이 많은 나라서 못 봤을 거라 생각 할 수도 있지만 저는 제피보다 늦게 잠들고, 훨씬 더 늦게 일어나는 편이니 종종 당신의 자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보통 사람들의 잠든 모습을 둘로 나눕니다. 잠자는 모습이 유난히 귀여운 사람 그리고 유난히 얄미운 사람이 있어요. 대부분의 사람이 둘 중 하나로 나뉘어요. 그러나 당신의 잠든 모습은 그 두 유형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잠든 모습은 이불이 있으면 덮어 줄 테고, 몸을 떨고 있다면 안아주고 싶을 만큼 작고 야위었어요.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처럼요. 감정 표현이 적은 당신이 드문드문 활짝 웃는 것보다 더 생소한 모습이었어요. 작은 몸을 웅크리고, 감은 눈에 지나간 감정을 아직 닦지 못한 채로 조그마한 숨을 내쉬고 있었어요. 숨이 이어지지 않을까 봐 걱정될 정도로 얕은 숨이었어요. 아마 당신이 잠든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품을 내어줄 정도로 당신은 가녀린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순간 생각했어요.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난 당신이 강철로 만든 갑옷을 입는 걸지도 모른다고. 당신은 매일 그런 모습으로 잠자리에 듭니다. 당신은 누군가의 잠든 모습을 유심히 바라본 적이 있었나요?
오늘은 뒤늦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윗집 아이 관우에게서 받은 초콜릿 서너 개를 먹으며 편지를 썼어요. 달곰쌉쌀한 초콜릿이 유난히 빠르게 작별 인사를 이끌었네요. 다음에 만나면 꼭 나누어 주고 싶은 맛이에요. 덜어갈 병을 준비해야겠어요. 그럼 안녕 제피. 좋은 꿈 꿔요!
샤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