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인에게 보내는 첫 편지입니다.
세 번째지만 올해 쓰는 첫 편지이기에 처음이라는 설렘을 띄워봅니다.
2021년의 마지막을 사랑하는 이들과 따뜻한 시간을 보냈나요? 가히 그렇다고 자부합니다.
사실 과거의 나는 공휴일에 늘 술과 함께 보냈어요. 그날의 현실이 싫기도 했고, 그냥 마시고 취한 채 뒹구는 게 즐거웠으니까요. 근데 해가 지날수록 고요히 보내는 날들이 많아지기 시작했어요. 이유는 점점 사람들을 멀리하기도 했고, 시끌벅적한 거리를 피해 고요히 나와 시간을 보내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올해 크리스마스는 지리산에 있었고, 새해가 밝기 전날은 가족들과 저녁을 먹고 일찍 잠이 들었어요. 눈을 뜨니 실감 나지 않았지만, 나는 서른하나로 규정되더라고요.
12월을 곱씹어 보니 떠오르는 게 그냥 평택 집이더라고요. 쾌쾌한 먼지가 쌓여있는 계단식 복도, 20년은 지난 우리 집 쇠 철문, 들어가면 엄마가 가꾸는 화분과 어항 속 물고기들. 이제는 나보다 작아져 버린 우리 집 천장. 누워 있는 엄마와 아빠. 나 또한 서서히 늙어간다는 걸 체감 중인 건지 유난히 엄마, 아빠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어요. 12월은.
샤인은 알겠지만 취하면 가족들에게 받은 상처들이 기어 올라왔어요. 그 기억들은 여전히 어딘가에 남아 나를 할퀴겠지만, 나이가 든다는 것 또한 정말 무서워요. 이제 그들이 이해되고, 가끔 기억 속의 그들이 애처로워요.
그들과 늙어가는 시간 속에서 더 이상 누군가를 책망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렇다고 용서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살고 싶지 않더라고요. 마음이 넉넉해진 걸까요. 아니면 시간이 다 해결해 준 걸까요. 기필코 누군가 탓하고 용서 받아야겠다면 불행의 끈을 잡고 오랜 시간 버틴 ‘나’를 원망해 봐요.
부모님에게 대단하지 않지만 평범한 딸이 되고 싶어서 새해 선물을 들고 갔습니다.
12월 31일 회사에서 마지막 작업을 하고 급하게 신촌 현대 백화점에 가서 선물을 골랐어요. 마음은 샤넬이며 구찌며 에르메스며 동년배에게 자랑하기 좋은 물건을 한 보따리 사고 싶었는데 아직 그 정도의 여력이 되지 않더라고요. 때문에 자랑거리가 될 만한 물건 대신 평소 좋아하던 브랜드에서 신발과 목도리를 샀습니다. 아빠의 선물은 초록색 목도리였고, 엄마의 신발은 주황색 패딩 운동화였어요. 들뜬 마음이 가시지 않아 와인코너에서 와인도 한 병 샀습니다. 이후에 말하겠지만 와인은 부모님을 위한 건 아니었어요.
선물을 사고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오늘은 외식하자고 했지만 귀찮아하더라고요. 갑자기 마음이 팍-하고 식더니 순간 짜증이 났습니다. 그냥 집에서 배달시켜서 먹어도 되는 데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지. 늘 그랬던 것처럼 짜증을 회피하기 위해 자극적인 유튜브를 시청하고 나니 웃기게도 기분이 나아지더라고요. 마치 샤인의 떡볶이처럼.
집에 도착해서 입을 쭈욱 내밀고 10살 아이처럼 삐쳐서 ‘이거 선물’이라고 하고 방으로 들어갔어요. 따라 들어온 부모님은 나갈 채비를 한 채 옷을 갈아입고 있더라고요. 순간 옹졸했던 나의 마음이 살갗을 파고 물집을 냈습니다.
이들은 나의 목소리와 표정만으로도 내가 얼마나 찌질한지, 잘 삐치는 인간인지 아는 가족이었습니다. 2021년 평택에 내려오길 잘했다고 느끼는 순간입니다.
엄마는 내가 준 신발을 한동안 거실에서 신고 짧은 거리를 왔다 갔다 하며 신이 났어요. 아빠는 엉성하게 목도리를 목에 두른 채, 보일러가 빵빵한 방 안에서 ‘이거 따시네’라며 좋아하더라고요.
집 근처에 있는 양식당에 갔습니다.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함께 나눠 먹었어요. 집에 돌아와서 한동안 엄마는 신발을 지켜봤고, 아빠는 목도리를 풀지 않고 텔레비전을 보더라고요.
말할 수 없었지만 나는 부끄러웠고 행복했습니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원망도 했다가, 자책도 하면서 사랑을 내뱉는 모순적인 사람인데, 이들은 비싼 명품도 아닌 신발과 목도리에 행복해하는 모습이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행복은 인도에도, 아프리카에도, 미국에도 있던 게 아니라 그저 이 작은 방구석에 있던 걸까.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웠던 장면이었습니다.
나는 알아요. 샤인도 나처럼 엄마에 대한 원망이 있지만 한편으로 엄마가 안타깝기도 하다는걸. 샤인에게 한 번도 말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샤인은 나보다 더 어른 같아요. 엄마로부터의 독립을 떠나서 엄마를 책임지는 어린 나이의 샤인이 줄곧 대단했거든요. 엄마의 투정들도 이해하려 하고 달래주는 샤인은 가장 좋은 딸이자, 친구이며 나아가 샤인이 그토록 되고 싶다던 좋은 엄마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25살 때부터 해 왔습니다. 우리는 사랑이 가득한 가정에서 자라지 못했지만, 누구보다 세상과 많이 접촉하며 ‘사랑’이라는 언어에 대해 동경하고 탐구해 왔으니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샤인이 내가 자는 모습을 묘사한 편지를 봤을 때 더욱더 확신했습니다. 샤인이라는 존재는 사랑받아야만 하는 그럴 자격이 넘치는 사람이라는걸. 누군가를 조용히 지켜본다는 것, 깨우지 않고 그 사람의 꿈을 옆에서 묵묵히 본다는 것.
그리고 가끔 그 모습들을 떠올리며 살아가는 샤인의 시선은 이 시대 속 사랑의 표본이라고 느꼈어요. 에로스, 스토라게, 필리아, 아가페 다 집어치우고 이건 안시내의 사랑이라는 걸요.
나는 그런 샤인이 계속해서 그 힘으로 글을 쓰고, 가끔은 멍청한 일들을 꾸리는 데 썼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어봐요. 2022년도 그리고 추후의 당신도.
다만 아픈 일이 있다면 편지라는 창구를 통해 토해내며 살아가자고 약속해주세요. 프로젝트가 끝나더라도 소문 없이 편지를 보내며 확인의 여부를 떠나 쓰는 것만으로 위로 받자고 말이에요.
작년 한 해는 나와 즐거운 친구가 되던 해였습니다. 덕분에 나는 30년 인생 처음으로 타인을 자세히 보고, 곁에서 이야기를 하며 함께 있고 싶다는 결심이 섰어요. 짧은 기록을 모아 만들었던 나의 기록물처럼 이번에는 내가 아닌 내 삶의 살덩이 같은 사람들에게 선물하려 합니다.
아주 문득 내가 당신을 따라 어디든 걷고 있다면 귀찮아하지 말아 주세요. 내 사랑의 방식은 아주 조용히 옆에서 지켜보며 기록하는 일뿐인걸요.
와인을 산 이유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그건 내 청춘의 영원한 시 속에 있는 샤인과 함께 마시고 싶어서 샀습니다. 고마워요. 오랜 시간 나라는 사람을 버텨줘서.
마지막은 서른 살이 된 샤인에게 선물하고자 내 인생을 채운 시를 선물합니다.
이미 알겠죠. 제가 너무 사랑한 시라.
내 청춘의 영원한
-최승자-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사랑을 담아,
제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