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인의 힘
답장은 받지 못했지만, 답장 없는 편지를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이건 샤인과의 약속이기도 하고, 나와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오래전 샤인에게 스무 살에 썼던 부끄러운 글을 보여드린 적이 있습니다. 글의 주제는 ‘신뢰’에 관한 글이었지요. 어렴풋이 생각나는 건 수두룩하게 많은 사람의 신뢰를 깨고 일종의 고백을 쓴 글입니다. 나는 게을렀고, 귀찮은 게 많았던 사람입니다. 상대방과의 약속을 아무렇지 않게 깬 후, 그것을 포장하던 못난 사람이었어요.
당신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되겠죠. 그래서 조용히 삼켜내려고 했습니다. 근데 문득 A가 생각났어요. 부드러운 분위기와 반대로, 상대방에게 생긴 불만이나 서운한 점 혹은 고쳐줬으면 하는 점을 강단 있게 이야기해요. 조심성 많은 인간인 A는 늘 그 시간이 끝나면 술잔을 기울이며 어린아이처럼 속상해했죠. 그때마다 허세 가득한 낱말들로 그녀를 위로했습니다.
“안 바뀌면 거기까지인 거지. 뭐. 넌 잘했어. 솔직한 거잖아.”
생각해 보면 그건 다 허영심 가득한 모순입니다. A에게 무안할 정도로 나는 그다지 솔직하지 못해요.
나는 샤인만큼 연애를 많이 하지 않았어요. 몇 소절 안 되는 연애를 회상해보자면 구질구질한 모습만 스칠 뿐이죠. 늘 돌아오는 상처가 싫어서 상대방의 모난 모습들이 보이면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마음 한구석에 기록해 둡니다.
어느 순간 한계가 오면 그때부터 동물들이 겨울나기를 하기 위해 여름부터 준비하듯 유통기한을 두며 연애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미적분 공식처럼.
소문도 없이 상대방에게 어떠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헤어지자고 이야기합니다. 그게 하늘이 아주 청명해서 아름다운 날이든, 눈이 온 세상을 뒤덮어 포근한 날이든, 애처롭게 비가 오는 날이든 상관없이요. 그저 다른 날과 똑같이 행동하고 이야기하다가 갑작스레 내뱉어요.
‘헤어지자’
상대방은 휘둥그레 놀랍니다. 아니 어제까지 문자며 전화를 잘하던 애가 왜 갑자기 이런 마음을 먹었냐고 묻지만 나도 모르겠다는 대답만 해요. 사실 모르겠다는 말은 순전히 변명이라는 걸 샤인도 알겠죠. 다만 아주 오래전부터 결심해 왔던 일이기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별을 선언합니다. 저의 배려 없는 관계는 지독하지만 늘 이래 왔어요.
그렇다고 편지 한 통 답장하지 않은 샤인에게 ‘헤어지자’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아요. 걱정 마요. 당신에게 기대하지 않아서? 이럴 줄 알았기에? 사랑과 우정은 달라서? 그건 아닙니다. 나의 진심 어린 편지의 내용이 별로였는가부터 시작해서, 여러가지 생각에 잠겼지만 하나 확신하는 건 있었거든요. 우여곡절 끝에 당신에게 답장을 받아내고 편지를 읽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웃고 감격할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죠. 그게 샤인이 가진 힘이고요.
얄미워 죽겠지만, 샤인은 단 하나의 문장으로 나를 무너뜨려요. 그런 샤인의 편지를 읽고 나는 좁은 마음을 가졌던 나를 용서하지 못해요. 사실 프로젝트를 하자고 했던 건 샤인이기에 책임감을 묻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런 서사 정도 있어야 서로를 알아가는 끝에 우리의 거리가 더 좁혀져 있겠죠. 덧붙여 평생 멍청한 친구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걸 굳게 믿어서일까요. 확실한 건 어쨌거나 너무 다른 우리니까요. 때문에 믿는다는 말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말을 남기고 싶어요.
다만 부탁하고 싶은 건 위의 내용을 읽고 나를 우려한 글을 쓰지 말아요. (당연히 안 그러는 사람이라는 걸 알지만) 누군가를 내몰아서 받은 글은 사양하고 싶고, 그건 당연히 글을 읽는 사람으로서, 쓰는 사람으로서 가장 최악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늘 그랬던 샤인처럼 “아~그랬구나. 근데 난 귀찮아”라며 넘겨주세요.
나는 또 실망하겠지만 샤인이 뱉은 단어 앞에서 실소를 보이겠죠. 최승자에게 내 청춘의 영원한 삼각형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내 청춘의 멍청한 삼각형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죠.
진흙탕 같던 글을 여기까지 읽어 준 당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해야겠어요. 이게 바로 오늘의 마음이었고, 오늘의 편지였어요. 우리가 함께했던 수많은 시간 속에 몇 안 되는 진짜 나를 보여주는 것 같아 속이 시원하고요. 이게 편지의 힘이 아닐까 싶어요. 찌질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할게요. 더 이상 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한탄이 계속될 것 같아요.
오늘은 인천에 가서 영화를 봤어요. 영화를 보고 배다리 책방 골목을 기웃거리며 몇 없는 손님을 위해 책을 정리하고, 커피를 내리고 반기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귀찮은 일이라도 사람들은 오늘도 자신의 몫을 해내고 있더라고요. 더욱더 열심히 살아봐야겠습니다.
오늘 발견한 커피집은 나이가 지긋한 사장 언니가 하는 책이 아주 많은 카페였어요. 음악 소리가 작았고,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바라나시 버닝 가트 쪽에 있던 ‘멍카페’를 연상시키더라고요. 나중에 귀찮더라도 한 번쯤은 함께 가주기를 염원하며 오늘의 편지를 마칠게요.
p.s 역시나 방금 이 편지를 보내려고 하는 순간 당신의 답장을 보았고 무너져 버린 나는 실소를 하며 웃으면서 나지막이 외쳤습니다. 재밌네요. 샤인의 힘.
‘X발(웃음)’
사랑을 담아,
제피